하목사님, 창세기 강해설교 중에 나온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 중에 있다. 가정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방법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가정예배는 어떻게? 매일? 무슨 말씀? 언제? 갓난아기는? 등등을....
가정 예배 - 결혼한 지 157일째
신혼의 부부가 드리는 가정예배....
첫날밤의 가정예배
강선영 목사(낮은울타리 가정예배사역원장 http://wayzine.com/)의 칼럼 중 하나, 아름다운 가정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되심 선포하는 것이라는 내용.
가정 예배: 제임스 W. 알렉산더 씀 /임종원 옮김
가정 예배는 모든 가족들이 가정에서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족들이 준수해야 할 가정의 의무이다. 가정 예배는 분명한 규범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명시되어 있는 조항은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는 가정 예배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죽음이 우리 가정에 임하였을 때 기도하라는 명령도 거의 발견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가정 예배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임된 특성이며 또한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숨을 쉬어야 하듯 거듭난 영혼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 영혼에 기도의 은혜가 부어지게 되면 그에 합당한 행동이 뒤따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종종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싶은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느끼게 된다. 주위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람의 마음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가르치셨다. 이 기도로 교회는 하나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만약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면 분명히 그들은 친하게 지내면서 거룩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정 예배의 기원이다. 이 땅에 두 사람만 살았던 때가 실제로 있었다. 그때 그들은 함께 하나님을 경배했는데, 바로 에덴 동산에서의 가정예배이었다. 이는 엉뚱한 망상이 아니라 위대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실제로 있었던 거룩한 경배이다. 아래의 시는 아담과 이브가 아침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동녘이 밝으면서 태양이 떠올라
대양(大洋)의 언저리에 수레바퀴 살처럼
이슬 같은 광선을 대지에 비추어
낙원의 동쪽 에덴의 복된 들판을 드넓게 펼쳐 보이니,
저들은 나직이 엎드려 경배하면서
아침마다 다양한 자세로
때맞춰 드리던 기도를 시작한다.
갖가지 태도나 환희에 찬 모습으로
곡조를 읊조리며 즉흥적으로 노래하며
창조주를 찬양한다.
즉석의 웅변이 저들의 입에서
산문(散文)이나 아름다운 시로 흘러나오니
비파나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보다 더 흥겹다.
이제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실낙원 5권)
아담과 이브가 드린 경배가 가정 예배였음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가정은 가장 오래된 인간 사회로서 인류의 창조만큼이나 역사가 장구하다. 인간은 무신론자들이 허황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자의적인 결정이나 계약에 의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에 의해 가족으로 지음 받았다. 모르던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가정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침례를 통하여 주의 백성에게 가족 관계를 존중해야 함을 상기시키셨다.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가정 예배의 역사를 찾아 강조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필자는 가정 예배가 인류의 기원 이래 지금까지 늘 존속해 왔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구약 성경이 이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굳이 기발한 상상을 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 전부터 친숙한 가정 예배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온 교회가 방주 안에 있는 동안 그들이 드린 예배는 분명히 가정 예배였다. 땅을 덮었던 물이 말랐을 때 노아는 “주께 희생단(제단)을 쌓고” 가족과 함께 희생단에서 태우는 헌물(번제)을 드렸다(창 8:20). 구약의 이스라엘 족장들은 모든 야영지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모레 광야에서 희생단을 쌓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창 12:7). 이와 똑같은 일이 아이와 벧엘 사이의 골짜기에서도 있었다. 그 후 이삭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고 브엘세바에 희생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창 26:25). 야곱이 한 말로 볼 때 그가 벧엘에 쌓은 희생단은 가족의 희생단이었음이 확실하다. “이에 야곱이 자기 집안 족속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어버리고 ”(창 35:2). 야곱이 쌓은 희생단의 명칭은 ‘엘벧엘’로서(창 35:7), 그 뜻은 ‘벧엘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의식이 가족 대대로 전수되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 18:19).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 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리라.” 욥은 아들들을 위하여 늘 하나님께 태우는 헌물(번제)을 드렸다. “욥이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 헌물을 드렸으니... 욥이 계속하여 이같이 행하였더라.”(욥 1:5). 신명기는 가정의 예배 규범이라 할 수 있는데 두드러진 내용이 신명기 6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유월절 역시 가족 의례였다.
구약 시대 당시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은 가정 예배를 드렸다. 여호수아는 온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지라도 자신과 자기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하였다.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수 24:15). 다윗은 회막에서 백성과 함께 경배를 드린 후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고....다윗이 자기 집안사람들을 축복하였다”(삼하 6:18-20). 또한 그는 아비 이새 집안의 온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단을 쌓았다.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해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있기 때문이니이다.”(삼상 20:6). 대언자 스가랴는 하나님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에게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제각기 애곡하게 하실 것이라고 대언하였다. “이 땅이 애통하되 가족마다 따로 애통하리니 곧 다윗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가족도 가족마다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따로 하리라.”(슥 12:12-14).
오늘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가정 예배를 드린다. 그들의 전례에는 그 어떤 기독교 교파의 의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주로 독일과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전례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전례는 여섯이나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날마다 드리는 기도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을 정결케 하고 감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유대인의 의무이다. 경배드릴 때 그들은 술이 달린 예복을 입고 기도와 찬송과 성경 낭송 등과 같은 순서로 진행하며, 안식일과 절기에는 특별히 낭송하는 성경 본문이 따로 있다. 이러한 전례는 반드시 아침 식사 전에 행하도록 되어 있다.
매일 저녁마다 드리는 경배는 아침에 행하는 전례에 비해 약간 짧을 뿐 순서가 똑 같다.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를 제외한 아침 경배 시간에 ‘테필린(Tephiline)'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착용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모세 오경과 대언서에서 발췌한 성경 본문을 낭송한다. (이상은 유대인 학자이자 히브리어 교수인 헨리 골드스미스가 말한 내용이다. 런던에서 간행된 『독일과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회당과 가정에서 낭송한 매일의 기도문』도 참고하기 바란다.)
신약성경에서도 가정 예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헤밀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의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주셨던 고넬료를 부러워하십니까? 그는 “경건한 사람이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로서,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구원을 열망하였으며,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행 10:2, 24-25, 3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조력자였으며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부럽습니까?(행 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에 박식하였던 까닭은 그들이 가정 교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롬 16:5)
가족은 일상적인 일뿐 아니라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성경이 일러주는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못한 자니라.”(딤전 5:8). 다락방과 감옥, 전도 여행 도중과 해변 등 어디서든지 합심하여 밤낮으로 기도하며 찬양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날마다 가정 예배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행 1:13-14, 16:25; 갈 4:12; 딤후 1:3).
오늘날, 본래의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영적 경배가 성직자의 복잡한 의식으로 변질되었고 미신적인 전통에 의하여 많이 왜곡되고 와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세기의 신자들이 가정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음을 여러 증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맨트 주교는 그의 저서 『매일의 기도』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일과처럼 열심히 가정 예배를 드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아우구스투스 네안더는 미발간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루 세 번, 아홉 시와 열두 시와 세 시에 기도한 유대인들처럼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습관적 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훼손하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기도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어디서든지 항상 기도한다는 외에 특별한 규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맺었습니다. 그들은 세수하고 식사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육신의 음식물과 자양분을 공급하기에 앞서 영의 음식물과 자양분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활 신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에서 온 믿음의 형제들을 환대한 후 떠나보낼 때 ‘하나님의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일상의 모든 생활을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대 풍습에 관하여 연구했던 한 학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들은 빈둥거리거나 저속한 오락이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이교도들의 불경스러운 노래를 부르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대신 이성적이며 유익한 활동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신앙 지식을 넓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개인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방편이자 가족끼리 즐기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신을 재충전한 후 그들은 새로운 열정을 품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여가 활동에 만족하였으며 식욕을 채움으로 피로를 풀기보다는 이런 일로서 고단함을 해소하였습니다. 물레 앞에 앉은 젊은 아낙네들과 집안일을 하는 여인들은 늘 찬송을 흥얼거리면서 일했습니다. 제롬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할렐루야를 외치고, 들에서 풀 베는 촌부가 찬송을 읊조리며, 포도원 일꾼이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전이나 식사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성호를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 가족이 아침 일찍 한 자리에 모여 구약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간밤에 지켜주셔서 모두가 아침에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모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온갖 위험과 유혹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며, 각자 모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맡은 일을 귀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녁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모여 아침에 드렸던 것과 똑같이 경배를 드렸는데 차이점이라곤 아침보다 경배 드리는 시간이 좀 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 외에도 그들은 한밤중에 모여 기도하며 찬송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케이브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이 낮에 모이지 않고 밤에 모임을 가졌던 것에서 비롯된 풍습이라고 합니다.” (라이먼 콜먼의 『그리스도 교회의 고대 풍습』 2판 p.375)
우리는 종교 개혁 시대에로 내려와도 가정 예배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운 증언을 접하게 된다. 자녀들의 행실이 어떠하였든 간에 종교 개혁자들은 대부분 가정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루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전기 작가들은 루터가 가정 예배를 드리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기독교가 전성기였을 때, 독일 교회는 가정 예배가 널리 확산되는 복을 받았으며, 이와 같은 일이 스위스와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가정 예배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나라는 단연 스코틀랜드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자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정 예배에 충실하였다. 지역 주민 수에 비례할 때 그토록 많은 가정이 가정 예배를 드렸던 나라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는 1647년에 가정 예배 규칙서를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족의 통상적인 의무는 한 자리에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할 때 먼저 기도하고 찬송하며 교회와 국가와 가족을 위하여 간구한다. 그 다음에는 성경을 읽고,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문답식 공부를 한다. 또한 온 가족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가장(家長)은 가족 중에서 권면할 자를 권면하고 훈계해야 할 자를 훈계한다. 가장은 예배에 불참하는 식구가 없도록 감독하며 예배 순서를 인도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인도자는 나태한 신자들을 지도하고 나약한 교인들을 훈련시켜서 가정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사를 발휘하려면 당연히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적으로 미숙하고 나약한 신자들은 기도하는 습관을 익히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자녀에게 주신 기도의 영을 분발시키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영은 우리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간절하면서도 열심히 기도하게 하며, 가족을 위하여 중보하게 해준다. 우리는 무신론자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생업이나 그 밖의 사유 때문에 가정 예배를 뒤로 미루지 말고 성실하게 드려야 한다. 최근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베풀어 주신 긍휼과 징계에 대하여 감사하자. 이로 인하여 이 나라의 위정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각 가정마다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고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정말로 감사한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였을 때 그 고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은 매일 각 가정에서 그리고 개개인을 통하여 영과 진리로 경배 받으신다.”(21장 6절) 이 원칙에 따라 가정 예배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외딴 오두막에 거주한 농부들조차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외하였으니, 당시에는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별난 사람들만의 특성이 아니었다. 이에 관한 해밀턴의 증언을 들어보자.
“저는 가끔 대저택에 사는 가족이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지만, 오두막의 흙바닥에서 기도하는 가족과 함께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헛간에서 일하는 자들도 가정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하구와 호수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에서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저는 탄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번즈는 스코틀랜드의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기도한 자기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더라면 자신이 더 행복하였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에서 토요일 저녁에 스코틀랜드의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을 목격할 수 있을까요?”라는 그의 질문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난로 가에 둘러앉는다.
큰 성경을 갖고 계신 아버지는
근엄하면서도 자상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신다.
아버지는 공손히 모자를 벗어 한쪽에 두시고
듬성듬성 남은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으신다.
이제 시온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었으니
아버지는 좌우를 둘러보시면서 엄숙한 목소리로
자, 하나님께 경배 드리자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열심히 찬송하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니
마치 던디가 열광적으로 노래하며
엘진이 하늘을 향해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아
그 소리가 스코틀랜드 전역에 울려 퍼진다.
이탈리아의 단조로운 노래와 비교해 보라.
귀에 익지 않은 자들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그 노래는 창조주에 대한 찬양과 어울리지 않는다.
제사장 같은 아버지가 성경을 읽으시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장면인가
아니면 모세가 불경스러운 아멜렉 자손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는 부분인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한 다윗 왕이
애통하며 회개하는 내용인가
아니면 욥이 탄식하며 울부짖는 대목,
이사야서에서 스랍이 등장하는 장면,
또는 선견자들이 수금을 연주하는 광경인가.
아마 그리스도인의 말은 일정한 주제이리라.
어찌하여 죄인을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이름을 지니시고
이 땅에선 머리 뉘일 곳조차 없으셨을까.
처음으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는 사라졌으나
그들의 지혜로운 교훈은 온 세상에 두루 퍼졌다.
밧모 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해와 같이 빛나는 천사를 보았으며
바벨론의 최후에 대한 선포를 듣지 않았던가.
영원하신 만유의 왕 앞에 무릎 꿇은 채
최후 승리를 고대하며 기도하는
성자와 아버지와 남편,
훗날 그들은 한 자리에서 만날 것이다.
그곳에는 자연광선이 비취며
더 이상 한숨이나 눈물이 없고
다함께 창조주를 찬양할 뿐이니
거기선 오직 주를 경외하는 가운데
영원한 시간이 지속된다.
온갖 화려한 기교와 방법을 동원한
어리석은 종교와 비교해 보라.
회중이 사방에서 몰려왔으나
그들은 진정으로 신(神)을 경외하지 않는다.
그 힘과 향기와 화려한 행렬은 사라지고
그 호화로움과 사제(司祭)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게도 외딴 오두막에서는
만족스러운 영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 제임스 W. 알렉산더 著 임종원 譯 『가정예배는 복의 근원입니다(Thoughts on Family Worship)』(미션월드 라이브러리 발행)에서 발췌 정리 -
예스러운 가정: 윌버 채프만(John Wilbur Chapman) / 정창영 옮김
기독교TV 인터넷 방송국 CTS.TV, 말씀/교육>오늘의가정예배
가정예배로 건강한 가정 만들자 교회가 모범적인 가정예배 모델 제시해야
우리 집의 신나는 가정예배, 김요한/ 김미란 선교사(GMP)
한경직목사님 가정예배
기독교대한감리회 혜성교회, 가정예배서
하늘양식(2006가정예배서) 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재)
가정 예배 설교 힌트 성구
한국로고스목회정보는 한국교회 목회자 목회정보 설교정보 나눔터입니다
건호아빠
가정 예배 - 결혼한 지 157일째
신혼의 부부가 드리는 가정예배....
more..
이제 며칠 후면 결혼 후 반 년이 되는 2000년의 새 봄...... 결혼한 1999년 10월 16일부터 시작된 가정 예배는 지금까지 세 번 빠뜨린 일이 있긴 하지만 계속 드려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드린다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성경 본문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서 자칫 부담이 없는 시간으로 느껴져 예배라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할 우려가 있지만 이 가정 예배 시간은 우리 결혼 생활의 기초가 되는 반석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가정 예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배 장소로는 대부분 책들이 꽂여 있는 작은 방을 사용합니다. 작은 방에는 두 사람이 함께 책을 볼 수 있는 긴 책상과 바퀴가 달린 빨간 의자와 파란 의자가 있습니다. 이 책상은 결혼할 때 선화가 준비해 온 책상인데 지금도 선화가 아끼는 가구 중 하나입니다. 어쩌다 의자를 움직이다가 책상 모서리에 흠이라도 가면......"아....내 책상...." 하면서 안타까와 합니다. 그 책상에는 전기 스탠드가 놓여 있습니다. 결혼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신창동의 조명 상가에 가서 사온 거지요...이렇게 스탠드에 불을 밝힌 뒤 제가 선화의 오른 쪽 의자에 앉아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
예배 순서는 간단합니다. 먼저 찬송을 부릅니다. 대부분 찬송가입니다. 때때로 기타를 가지고 와 가스펠 송을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찬송가에서 곡을 택합니다. 역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이 부른 찬송가는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누가 곡을 주로 택하느냐고요? 주로 제가 고릅니다. 선화도 고를 때가 있지만...아마 선화는 제게 주도권을 일부러 넘겨 주나 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는 단연 199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 가리라 ) 와 200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는 크신 능력 다 찬송할지라 찬송하세 주의 보혈 그 샘에 지금 나아가 죄에 깊이 빠진 이 몸 그 피로 씻어 맑히네) 입니다. 이 두 곡을 바로 얘기할 수 있는 걸 보면 이 두 곡을 참 많이 불렀나 봅니다. 두 곡은 모두 공통적으로 보혈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찬송가는 보통 1곡만 부릅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참고로 사용하는 부 교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영철 선생님이 쓰신 성경 정독집입니다. 성경 정독집은 구약을 상,중,하 의 3권으로 편찬해 놓았습니다. 연애 시절 선화와 전 성경 정독집 구약 상을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낸 뒤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우린 계속 이어서 성경 정독집 구약 중을 가정 예배의 보조 교재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주 교재는 물론 성경이지요. 성경 정독집을 이용해 하루에 성경 본문을 1 장 읽고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부교재를 참고로 하여 공부하는 형태입니다. 정독집은 7일에 한 번 중간 중간 마다 시편을 싣고 있는 데다가 그 관점이 참 좋아 전혀 지겹지 않은 교재였습니다. 성경 정독집은 성경에서 자기 자신과 직결된 윤리적 또는 도덕적 교훈을 찾아 내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계시(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심) 로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우린 정독집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관점이 많이 고쳐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 성경을 5절씩 번갈아 가면서 읽습니다. 제가 먼저 1절에서 5절까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한 장을 다 읽고 나면 그 장에서의 본문 내용 파악을 한 뒤 성경이 우리에게 비추는 계시의 빛을 따라가고자 정독집을 읽습니다.
아래는 정독집을 통해 읽었던 성경 본문입니다.(2000.2.22 현재)
연애 시절
성경정독집(구약 상)
예레미야,에스겔,다니엘,호세아
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
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
말라기,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전도서
두 사람이 각자 정독집을 통해 말씀을 일고 난 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로 하는 방식을 채택했었음.
실제로는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며(열심히 정독집을 통해 성경을 읽지는 못함) 4-5번 정도 1달에 한 번 가지는 정독집 모임을 가졌음
결혼 후
성경정독집(구약 중)
신명기
1999.10.16 -1999.11.24
여호수아
1999.11.25-1999.12.21
사사기
1999.12.22-2000.1.20
룻기
2000.1.23-2000.1.27
사무엘상
2000.1.28-2000.3.9
앞으로 정독집을 사용한 성경 공부를 포함한 가정 예배 시간을 계속 가질 계획입니다. 정독집 구약 중 이 다 마쳐지면 하 로 넘어가야겠고 성경 정독집 신약 도 계속 되어야겠지요....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나면 기도를 드립니다. 말씀을 통해 서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기도제목을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고 난 후 한 사람이 기도를 하고 난 뒤 주기도문으로 예배는 마치게 됩니다.
때로는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예배를 드리기 힘들 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언제가.....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 몸이 쑤시면서 몸살 증세로 고생하던 밤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하지만 " 말씀을 제대로 안 읽기 때문에 몸도 이렇게 아픈가 보다" 라고 말하고는 이내 성경, 찬송가를 챙기고 예배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임신 후 선화는 쏟아지는 잠을 못 이길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 따뜻한 방에 누워 자고 있는 선화를 보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깨우기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밤 1시가 넘어서면 선화를 깨워 예배 드리기도 합니다. 선화 역시 많은 집안일이 힘에 겨울 때가 있나 봅니다. 결혼 하고 난 뒤 굵어진 팔뚝을 보며 아줌마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귀담아 들어 둔 말이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 보며 사랑한다면 이내 싫증이 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다.' 우린 가정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가정의 관계를 다시 상기하고 또 상기하곤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어디에 던져야 하는지 늘 묻고 있습니다.
어제는 사무엘하 11장을 함께 보았습니다. 다윗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 짓게 되는 큰 죄악이 나타나는 본문입니다. 함께 5절씩 읽어 가면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했고 기도와 믿음의 본을 보여준 지도자이며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보여 주었던 다윗의 범죄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정독집은 여기서도 다윗이나 밧세바에게 내용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27절 하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요즘은 병원으로 출근하는 시간이 아침 7시입니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 7시 본관 3층에서 있는 부산지역 내과 전문의 시험 공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은 저녁 8시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 초에 비해 선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갑니다. 이럴수록 한 밤에 두 사람이 함께 스탠드를 켜고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읽는 시간은 우리에게 더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쓸쓸함과 부족함을 메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장소로는 대부분 책들이 꽂여 있는 작은 방을 사용합니다. 작은 방에는 두 사람이 함께 책을 볼 수 있는 긴 책상과 바퀴가 달린 빨간 의자와 파란 의자가 있습니다. 이 책상은 결혼할 때 선화가 준비해 온 책상인데 지금도 선화가 아끼는 가구 중 하나입니다. 어쩌다 의자를 움직이다가 책상 모서리에 흠이라도 가면......"아....내 책상...." 하면서 안타까와 합니다. 그 책상에는 전기 스탠드가 놓여 있습니다. 결혼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신창동의 조명 상가에 가서 사온 거지요...이렇게 스탠드에 불을 밝힌 뒤 제가 선화의 오른 쪽 의자에 앉아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
예배 순서는 간단합니다. 먼저 찬송을 부릅니다. 대부분 찬송가입니다. 때때로 기타를 가지고 와 가스펠 송을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찬송가에서 곡을 택합니다. 역시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이 부른 찬송가는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나 봅니다. 누가 곡을 주로 택하느냐고요? 주로 제가 고릅니다. 선화도 고를 때가 있지만...아마 선화는 제게 주도권을 일부러 넘겨 주나 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는 단연 199장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으니 그 피를 보고 믿는 자는 주의 진노를 면하겠네 내가 그 피를 유월절 그 양의 피를 볼 때에 내가 너를 넘어 가리라 ) 와 200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는 크신 능력 다 찬송할지라 찬송하세 주의 보혈 그 샘에 지금 나아가 죄에 깊이 빠진 이 몸 그 피로 씻어 맑히네) 입니다. 이 두 곡을 바로 얘기할 수 있는 걸 보면 이 두 곡을 참 많이 불렀나 봅니다. 두 곡은 모두 공통적으로 보혈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찬송가는 보통 1곡만 부릅니다. 그리고 말씀을 보게 되는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참고로 사용하는 부 교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김영철 선생님이 쓰신 성경 정독집입니다. 성경 정독집은 구약을 상,중,하 의 3권으로 편찬해 놓았습니다. 연애 시절 선화와 전 성경 정독집 구약 상을 함께 시작해서 함께 끝낸 뒤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 우린 계속 이어서 성경 정독집 구약 중을 가정 예배의 보조 교재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주 교재는 물론 성경이지요. 성경 정독집을 이용해 하루에 성경 본문을 1 장 읽고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부교재를 참고로 하여 공부하는 형태입니다. 정독집은 7일에 한 번 중간 중간 마다 시편을 싣고 있는 데다가 그 관점이 참 좋아 전혀 지겹지 않은 교재였습니다. 성경 정독집은 성경에서 자기 자신과 직결된 윤리적 또는 도덕적 교훈을 찾아 내는 일보다는 하나님의 계시(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심) 로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우린 정독집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관점이 많이 고쳐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 성경을 5절씩 번갈아 가면서 읽습니다. 제가 먼저 1절에서 5절까지를 읽기 시작합니다. 한 장을 다 읽고 나면 그 장에서의 본문 내용 파악을 한 뒤 성경이 우리에게 비추는 계시의 빛을 따라가고자 정독집을 읽습니다.
아래는 정독집을 통해 읽었던 성경 본문입니다.(2000.2.22 현재)
연애 시절
성경정독집(구약 상)
예레미야,에스겔,다니엘,호세아
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
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
말라기,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전도서
두 사람이 각자 정독집을 통해 말씀을 일고 난 뒤 한 달에 한 번 만나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로 하는 방식을 채택했었음.
실제로는 약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며(열심히 정독집을 통해 성경을 읽지는 못함) 4-5번 정도 1달에 한 번 가지는 정독집 모임을 가졌음
결혼 후
성경정독집(구약 중)
신명기
1999.10.16 -1999.11.24
여호수아
1999.11.25-1999.12.21
사사기
1999.12.22-2000.1.20
룻기
2000.1.23-2000.1.27
사무엘상
2000.1.28-2000.3.9
앞으로 정독집을 사용한 성경 공부를 포함한 가정 예배 시간을 계속 가질 계획입니다. 정독집 구약 중 이 다 마쳐지면 하 로 넘어가야겠고 성경 정독집 신약 도 계속 되어야겠지요....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나면 기도를 드립니다. 말씀을 통해 서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기도제목을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합니다.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고 난 후 한 사람이 기도를 하고 난 뒤 주기도문으로 예배는 마치게 됩니다.
때로는 너무 지치고 피곤해서 예배를 드리기 힘들 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언제가.....머리가 너무 아프고 온 몸이 쑤시면서 몸살 증세로 고생하던 밤이었습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하지만 " 말씀을 제대로 안 읽기 때문에 몸도 이렇게 아픈가 보다" 라고 말하고는 이내 성경, 찬송가를 챙기고 예배 준비를 하기도 했습니다. 임신 후 선화는 쏟아지는 잠을 못 이길 때가 가끔 있습니다. 저녁 식사 후 따뜻한 방에 누워 자고 있는 선화를 보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깨우기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기다리다가 밤 1시가 넘어서면 선화를 깨워 예배 드리기도 합니다. 선화 역시 많은 집안일이 힘에 겨울 때가 있나 봅니다. 결혼 하고 난 뒤 굵어진 팔뚝을 보며 아줌마가 되었다고 얘기합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귀담아 들어 둔 말이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 보며 사랑한다면 이내 싫증이 나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마르지 않는다.' 우린 가정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가정의 관계를 다시 상기하고 또 상기하곤 합니다. 우리의 삶을 어디에 던져야 하는지 늘 묻고 있습니다.
어제는 사무엘하 11장을 함께 보았습니다. 다윗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 짓게 되는 큰 죄악이 나타나는 본문입니다. 함께 5절씩 읽어 가면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외했고 기도와 믿음의 본을 보여준 지도자이며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에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세를 보여 주었던 다윗의 범죄 현장을 목도했습니다. 정독집은 여기서도 다윗이나 밧세바에게 내용의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27절 하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의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요즘은 병원으로 출근하는 시간이 아침 7시입니다. 일과가 시작되기 전 7시 본관 3층에서 있는 부산지역 내과 전문의 시험 공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퇴근은 저녁 8시가 되어야 합니다. 결혼 초에 비해 선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갑니다. 이럴수록 한 밤에 두 사람이 함께 스탠드를 켜고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읽는 시간은 우리에게 더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쓸쓸함과 부족함을 메워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첫날밤의 가정예배
강선영 목사(낮은울타리 가정예배사역원장 http://wayzine.com/)의 칼럼 중 하나, 아름다운 가정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되심 선포하는 것이라는 내용.
more..
“정말 도저히 못살겠어요. 결혼을 잘못한 것 같아요. 결혼하기 전에 저런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정말 저는 속았어요.... 어휴...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말 걸... ”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매가 새색시답지 않게 어둡고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이 자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사귀던 여자 사진을 아직도 책갈피에 끼워놓은 것 있죠? 그것도 몇 장씩이나... 그런 건 결혼 전에 다 정리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저에 대한 예의잖아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결혼하기 전에 사귄 여자들이랑 성관계도 있었나봐요. 정말 실망했어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냐고 그러는데... 너무 불결해 보여요.”
이 자매와 자매의 남편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고 여러 가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던, 겉으로 보기에 신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드러난 한 가지의 에피소드일 뿐 교회 안에 드러나지 않은 성적인 부도덕과 그릇된 성 가치관은 이미 위험수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대한 세미나와 결혼예비학교 같은 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한 지 더욱 깨닫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그 다음도 제대로 맞추어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의 첫 단추 혹은 첫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각 교회의 청년회에서 초청받아 이성관과 결혼관에 대한 세미나를 할 때마다 가슴깊이 느끼는 것은 이 결혼의 첫 단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성적으로 문란할 대로 문란하고 성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가정의 올바른 개념에 대해서도 희미해져 버린 시대입니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하거나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깊이 젖어버림으로 인해 죄의식이 희박해져 버렸으며, 올바른 성가치관이나 결혼관이 형성되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미디어의 영향이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더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혼전 동거나 혼전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이 시대의 문화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확실히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가정의 첫출발은 결혼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청년시기에 이러한 가치관이 확고히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밖에서의 모든 성적인 관계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너무 많습니다. 청년의 때를 성결하게 지키고, 한 사람의 배우자를 만나 기도로 준비하며,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세워지는 것인데, 결혼하기 전부터 왜곡되고 혼란스럽고 음란한 이 시대의 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게 된다면 아름다운 가정을 기대하기 힘들어집니다.
청년 시기는 무엇보다도 성결함을 유지하고 기도하며 미래의 가정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이 시기에 올바른 성 정체성과 성경적인 결혼관의 정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을 정립할 때에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둘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정예배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부터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결혼의 성결성과 중요함, 그리고 가정의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저희는 첫날밤에 가정예배를 드렸어요.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몰라요. 예배 드리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우리가정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정말 서로에 대해 더 신뢰하고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이제 막 시작되는 우리 가정의 주인이심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어요.”
최근에 결혼한 한 자매로부터 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강의를 통해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첫날밤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나서 은혜와 감격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결혼예비학교 강의를 할 때 마지막 시간에 꼭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첫날밤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첫날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분주하고 정신없던 결혼예식이 끝나고 사람들로부터도 멀리 떠나, 오직 두 사람만이 조용히 새가정의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첫날밤부터 새가정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새가정의 미래를 올려드리며 하나님이 이루신 축복의 가정임을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첫날밤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되심을 선포한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날까요? 결혼 전에 꼭 해야 할 일과 배워야할 내용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정예배를 통하여 날마다 가정의 성결함을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하나됨을 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혼은 종합예술이며 모든 부분에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결혼 전에 ‘부모로부터 떠나’는 훈련과 어렸을 때부터의 왜곡된 상처와 부정적인 습관 등을 버리고 새롭게 되는 치유도 필요하며, 둘이 하나되는 신비를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사랑으로 작은 천국을 이루어가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청년들과 이제 결혼을 시켜서 떠나보내야하는 부모님 모두가 이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준비하여 이 땅에 아름다운 가정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도합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매가 새색시답지 않게 어둡고 심각한 얼굴로 찾아와 하소연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자 이 자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 사귀던 여자 사진을 아직도 책갈피에 끼워놓은 것 있죠? 그것도 몇 장씩이나... 그런 건 결혼 전에 다 정리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저에 대한 예의잖아요.”
“그 뿐만이 아니에요. 결혼하기 전에 사귄 여자들이랑 성관계도 있었나봐요. 정말 실망했어요.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냐고 그러는데... 너무 불결해 보여요.”
이 자매와 자매의 남편은 불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고 여러 가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던, 겉으로 보기에 신실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저 드러난 한 가지의 에피소드일 뿐 교회 안에 드러나지 않은 성적인 부도덕과 그릇된 성 가치관은 이미 위험수위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에 대한 세미나와 결혼예비학교 같은 프로그램이 얼마나 중요한 지 더욱 깨닫게 됩니다.
무슨 일이든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그 다음도 제대로 맞추어지게 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혼의 첫 단추 혹은 첫 출발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각 교회의 청년회에서 초청받아 이성관과 결혼관에 대한 세미나를 할 때마다 가슴깊이 느끼는 것은 이 결혼의 첫 단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성적으로 문란할 대로 문란하고 성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가정의 올바른 개념에 대해서도 희미해져 버린 시대입니다. 결혼 전에 동거를 하거나 성관계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세상적인 가치관에 깊이 젖어버림으로 인해 죄의식이 희박해져 버렸으며, 올바른 성가치관이나 결혼관이 형성되지 않은 모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구나 미디어의 영향이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더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에 방영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혼전 동거나 혼전 성관계가 자연스러운 이 시대의 문화로 인식되게 만드는데 확실히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가정의 첫출발은 결혼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청년시기에 이러한 가치관이 확고히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힘들어 집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 제도 밖에서의 모든 성적인 관계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너무 많습니다. 청년의 때를 성결하게 지키고, 한 사람의 배우자를 만나 기도로 준비하며,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가정이 세워지는 것인데, 결혼하기 전부터 왜곡되고 혼란스럽고 음란한 이 시대의 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게 된다면 아름다운 가정을 기대하기 힘들어집니다.
청년 시기는 무엇보다도 성결함을 유지하고 기도하며 미래의 가정을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이 시기에 올바른 성 정체성과 성경적인 결혼관의 정립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적인 결혼관을 정립할 때에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둘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정예배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전부터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면 자동적으로 결혼의 성결성과 중요함, 그리고 가정의 중요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 저희는 첫날밤에 가정예배를 드렸어요.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몰라요. 예배 드리면서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우리가정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정말 서로에 대해 더 신뢰하고 더 사랑하게 된 것 같아요. 하나님이 이제 막 시작되는 우리 가정의 주인이심을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어요.”
최근에 결혼한 한 자매로부터 이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강의를 통해 들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첫날밤에 가정예배를 드리고 나서 은혜와 감격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
결혼예비학교 강의를 할 때 마지막 시간에 꼭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첫날밤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첫날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분주하고 정신없던 결혼예식이 끝나고 사람들로부터도 멀리 떠나, 오직 두 사람만이 조용히 새가정의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첫날밤부터 새가정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새가정의 미래를 올려드리며 하나님이 이루신 축복의 가정임을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시간입니다.
첫날밤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이 가정의 주인되심을 선포한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날까요? 결혼 전에 꼭 해야 할 일과 배워야할 내용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가정예배를 통하여 날마다 가정의 성결함을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부부가 하나됨을 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혼은 종합예술이며 모든 부분에서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결혼 전에 ‘부모로부터 떠나’는 훈련과 어렸을 때부터의 왜곡된 상처와 부정적인 습관 등을 버리고 새롭게 되는 치유도 필요하며, 둘이 하나되는 신비를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의 온전한 사랑으로 작은 천국을 이루어가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모든 청년들과 이제 결혼을 시켜서 떠나보내야하는 부모님 모두가 이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고 준비하여 이 땅에 아름다운 가정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예배: 제임스 W. 알렉산더 씀 /임종원 옮김
more..
가정 예배는 모든 가족들이 가정에서 한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으로서, 모든 가족들이 준수해야 할 가정의 의무이다. 가정 예배는 분명한 규범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에 명시되어 있는 조항은 아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서는 가정 예배를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죽음이 우리 가정에 임하였을 때 기도하라는 명령도 거의 발견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러나 가정 예배는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위임된 특성이며 또한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새로 태어난 아기가 숨을 쉬어야 하듯 거듭난 영혼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그 영혼에 기도의 은혜가 부어지게 되면 그에 합당한 행동이 뒤따른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종종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싶은 불가항력적인 충동을 느끼게 된다. 주위 사람들과 같이 기도하고 싶은 것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람의 마음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가르치셨다. 이 기도로 교회는 하나가 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각 가정에서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만약 이 세상에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면 분명히 그들은 친하게 지내면서 거룩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정 예배의 기원이다. 이 땅에 두 사람만 살았던 때가 실제로 있었다. 그때 그들은 함께 하나님을 경배했는데, 바로 에덴 동산에서의 가정예배이었다. 이는 엉뚱한 망상이 아니라 위대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실제로 있었던 거룩한 경배이다. 아래의 시는 아담과 이브가 아침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동녘이 밝으면서 태양이 떠올라
대양(大洋)의 언저리에 수레바퀴 살처럼
이슬 같은 광선을 대지에 비추어
낙원의 동쪽 에덴의 복된 들판을 드넓게 펼쳐 보이니,
저들은 나직이 엎드려 경배하면서
아침마다 다양한 자세로
때맞춰 드리던 기도를 시작한다.
갖가지 태도나 환희에 찬 모습으로
곡조를 읊조리며 즉흥적으로 노래하며
창조주를 찬양한다.
즉석의 웅변이 저들의 입에서
산문(散文)이나 아름다운 시로 흘러나오니
비파나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보다 더 흥겹다.
이제 저들은 이렇게 말한다.
(실낙원 5권)
아담과 이브가 드린 경배가 가정 예배였음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가정은 가장 오래된 인간 사회로서 인류의 창조만큼이나 역사가 장구하다. 인간은 무신론자들이 허황되게 주장하는 것처럼 자의적인 결정이나 계약에 의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에 의해 가족으로 지음 받았다. 모르던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가정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결혼은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침례를 통하여 주의 백성에게 가족 관계를 존중해야 함을 상기시키셨다.
구약시대부터 시작된 가정 예배의 역사를 찾아 강조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필자는 가정 예배가 인류의 기원 이래 지금까지 늘 존속해 왔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비록 구약 성경이 이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굳이 기발한 상상을 하지 않더라도 아주 오래 전부터 친숙한 가정 예배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온 교회가 방주 안에 있는 동안 그들이 드린 예배는 분명히 가정 예배였다. 땅을 덮었던 물이 말랐을 때 노아는 “주께 희생단(제단)을 쌓고” 가족과 함께 희생단에서 태우는 헌물(번제)을 드렸다(창 8:20). 구약의 이스라엘 족장들은 모든 야영지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자마자 모레 광야에서 희생단을 쌓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창 12:7). 이와 똑같은 일이 아이와 벧엘 사이의 골짜기에서도 있었다. 그 후 이삭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고 브엘세바에 희생단을 쌓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창 26:25). 야곱이 한 말로 볼 때 그가 벧엘에 쌓은 희생단은 가족의 희생단이었음이 확실하다. “이에 야곱이 자기 집안 족속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내어버리고 ”(창 35:2). 야곱이 쌓은 희생단의 명칭은 ‘엘벧엘’로서(창 35:7), 그 뜻은 ‘벧엘의 하나님’이다.
이러한 의식이 가족 대대로 전수되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다(창 18:19).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 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에게 이루리라.” 욥은 아들들을 위하여 늘 하나님께 태우는 헌물(번제)을 드렸다. “욥이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고 또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들 모두의 수대로 번제 헌물을 드렸으니... 욥이 계속하여 이같이 행하였더라.”(욥 1:5). 신명기는 가정의 예배 규범이라 할 수 있는데 두드러진 내용이 신명기 6장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유월절 역시 가족 의례였다.
구약 시대 당시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은 가정 예배를 드렸다. 여호수아는 온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길지라도 자신과 자기 집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선언하였다. “나와 내 집으로 말하건대 우리는 주를 섬기겠노라.”(수 24:15). 다윗은 회막에서 백성과 함께 경배를 드린 후 “만군의 주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고....다윗이 자기 집안사람들을 축복하였다”(삼하 6:18-20). 또한 그는 아비 이새 집안의 온 가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단을 쌓았다.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해마다 드리는 희생물이 있기 때문이니이다.”(삼상 20:6). 대언자 스가랴는 하나님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에게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제각기 애곡하게 하실 것이라고 대언하였다. “이 땅이 애통하되 가족마다 따로 애통하리니 곧 다윗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레위의 집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가족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모든 남은 가족도 가족마다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도 따로 하리라.”(슥 12:12-14).
오늘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가정 예배를 드린다. 그들의 전례에는 그 어떤 기독교 교파의 의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주로 독일과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전례와 깊은 연관이 있다. 근본적으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전례는 여섯이나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날마다 드리는 기도이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뿐 아니라 집에서도 성경을 읽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을 정결케 하고 감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유대인의 의무이다. 경배드릴 때 그들은 술이 달린 예복을 입고 기도와 찬송과 성경 낭송 등과 같은 순서로 진행하며, 안식일과 절기에는 특별히 낭송하는 성경 본문이 따로 있다. 이러한 전례는 반드시 아침 식사 전에 행하도록 되어 있다.
매일 저녁마다 드리는 경배는 아침에 행하는 전례에 비해 약간 짧을 뿐 순서가 똑 같다.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절기를 제외한 아침 경배 시간에 ‘테필린(Tephiline)'이라고 하는 성구함을 착용한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모세 오경과 대언서에서 발췌한 성경 본문을 낭송한다. (이상은 유대인 학자이자 히브리어 교수인 헨리 골드스미스가 말한 내용이다. 런던에서 간행된 『독일과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라 회당과 가정에서 낭송한 매일의 기도문』도 참고하기 바란다.)
신약성경에서도 가정 예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헤밀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의 방법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주셨던 고넬료를 부러워하십니까? 그는 “경건한 사람이요,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로서,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의 구원을 열망하였으며,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행 10:2, 24-25, 31).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의 조력자였으며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완전하게 풀어 설명해 주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부럽습니까?(행 18: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성경에 박식하였던 까닭은 그들이 가정 교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롬 16:5)
가족은 일상적인 일뿐 아니라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성경이 일러주는 의무를 이행하여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못한 자니라.”(딤전 5:8). 다락방과 감옥, 전도 여행 도중과 해변 등 어디서든지 합심하여 밤낮으로 기도하며 찬양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날마다 가정 예배에 힘쓴 모습을 볼 수 있다(행 1:13-14, 16:25; 갈 4:12; 딤후 1:3).
오늘날, 본래의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영적 경배가 성직자의 복잡한 의식으로 변질되었고 미신적인 전통에 의하여 많이 왜곡되고 와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세기의 신자들이 가정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음을 여러 증거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맨트 주교는 그의 저서 『매일의 기도』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일과처럼 열심히 가정 예배를 드린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아우구스투스 네안더는 미발간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루 세 번, 아홉 시와 열두 시와 세 시에 기도한 유대인들처럼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습관적 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를 훼손하는 형식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기도 시간에 대하여 ‘우리는 어디서든지 항상 기도한다는 외에 특별한 규정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맺었습니다. 그들은 세수하고 식사하기 전에 먼저 기도했습니다.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육신의 음식물과 자양분을 공급하기에 앞서 영의 음식물과 자양분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활 신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에서 온 믿음의 형제들을 환대한 후 떠나보낼 때 ‘하나님의 항상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일상의 모든 생활을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대 풍습에 관하여 연구했던 한 학자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들은 빈둥거리거나 저속한 오락이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거나, 이교도들의 불경스러운 노래를 부르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대신 이성적이며 유익한 활동을 즐기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신앙 지식을 넓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일은 개인적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방편이자 가족끼리 즐기는 일종의 레크리에이션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신을 재충전한 후 그들은 새로운 열정을 품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여가 활동에 만족하였으며 식욕을 채움으로 피로를 풀기보다는 이런 일로서 고단함을 해소하였습니다. 물레 앞에 앉은 젊은 아낙네들과 집안일을 하는 여인들은 늘 찬송을 흥얼거리면서 일했습니다. 제롬은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할렐루야를 외치고, 들에서 풀 베는 촌부가 찬송을 읊조리며, 포도원 일꾼이 다윗의 시편을 노래하는 것을 흔히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오전이나 식사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성호를 찬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온 가족이 아침 일찍 한 자리에 모여 구약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간밤에 지켜주셔서 모두가 아침에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모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온갖 위험과 유혹에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며, 각자 모든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맡은 일을 귀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게 해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저녁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함께 모여 아침에 드렸던 것과 똑같이 경배를 드렸는데 차이점이라곤 아침보다 경배 드리는 시간이 좀 길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습 외에도 그들은 한밤중에 모여 기도하며 찬송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케이브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이 낮에 모이지 않고 밤에 모임을 가졌던 것에서 비롯된 풍습이라고 합니다.” (라이먼 콜먼의 『그리스도 교회의 고대 풍습』 2판 p.375)
우리는 종교 개혁 시대에로 내려와도 가정 예배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운 증언을 접하게 된다. 자녀들의 행실이 어떠하였든 간에 종교 개혁자들은 대부분 가정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루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전기 작가들은 루터가 가정 예배를 드리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기독교가 전성기였을 때, 독일 교회는 가정 예배가 널리 확산되는 복을 받았으며, 이와 같은 일이 스위스와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그러나 가정 예배가 가장 활성화되었던 나라는 단연 스코틀랜드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신자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가정 예배에 충실하였다. 지역 주민 수에 비례할 때 그토록 많은 가정이 가정 예배를 드렸던 나라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는 1647년에 가정 예배 규칙서를 발간하였는데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족의 통상적인 의무는 한 자리에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할 때 먼저 기도하고 찬송하며 교회와 국가와 가족을 위하여 간구한다. 그 다음에는 성경을 읽고,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문답식 공부를 한다. 또한 온 가족의 신앙 성장을 위하여 다 함께 대화를 나누며 가장(家長)은 가족 중에서 권면할 자를 권면하고 훈계해야 할 자를 훈계한다. 가장은 예배에 불참하는 식구가 없도록 감독하며 예배 순서를 인도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 그리고 교회의 인도자는 나태한 신자들을 지도하고 나약한 교인들을 훈련시켜서 가정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사를 발휘하려면 당연히 기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영적으로 미숙하고 나약한 신자들은 기도하는 습관을 익히기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모든 자녀에게 주신 기도의 영을 분발시키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기도의 영은 우리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간절하면서도 열심히 기도하게 하며, 가족을 위하여 중보하게 해준다. 우리는 무신론자들과 경건치 못한 자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생업이나 그 밖의 사유 때문에 가정 예배를 뒤로 미루지 말고 성실하게 드려야 한다. 최근에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베풀어 주신 긍휼과 징계에 대하여 감사하자. 이로 인하여 이 나라의 위정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각 가정마다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고 선포하기에 이르렀으니 정말로 감사한다.”
스코틀랜드 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였을 때 그 고백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은 매일 각 가정에서 그리고 개개인을 통하여 영과 진리로 경배 받으신다.”(21장 6절) 이 원칙에 따라 가정 예배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확산되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외딴 오두막에 거주한 농부들조차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외하였으니, 당시에는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유별난 사람들만의 특성이 아니었다. 이에 관한 해밀턴의 증언을 들어보자.
“저는 가끔 대저택에 사는 가족이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았지만, 오두막의 흙바닥에서 기도하는 가족과 함께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심을 느꼈습니다. 헛간에서 일하는 자들도 가정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하구와 호수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에서도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저는 탄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번즈는 스코틀랜드의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특성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기도한 자기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았더라면 자신이 더 행복하였으리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에서 토요일 저녁에 스코틀랜드의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을 목격할 수 있을까요?”라는 그의 질문은 적절한 것이다.
우리는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난로 가에 둘러앉는다.
큰 성경을 갖고 계신 아버지는
근엄하면서도 자상한 눈길로 우리를 쳐다보신다.
아버지는 공손히 모자를 벗어 한쪽에 두시고
듬성듬성 남은 회색 머리칼을 쓰다듬으신다.
이제 시온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었으니
아버지는 좌우를 둘러보시면서 엄숙한 목소리로
자, 하나님께 경배 드리자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열심히 찬송하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니
마치 던디가 열광적으로 노래하며
엘진이 하늘을 향해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아
그 소리가 스코틀랜드 전역에 울려 퍼진다.
이탈리아의 단조로운 노래와 비교해 보라.
귀에 익지 않은 자들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며
그 노래는 창조주에 대한 찬양과 어울리지 않는다.
제사장 같은 아버지가 성경을 읽으시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장면인가
아니면 모세가 불경스러운 아멜렉 자손에게
영원한 저주를 선포하는 부분인가.
하나님의 징계를 당한 다윗 왕이
애통하며 회개하는 내용인가
아니면 욥이 탄식하며 울부짖는 대목,
이사야서에서 스랍이 등장하는 장면,
또는 선견자들이 수금을 연주하는 광경인가.
아마 그리스도인의 말은 일정한 주제이리라.
어찌하여 죄인을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셨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이름을 지니시고
이 땅에선 머리 뉘일 곳조차 없으셨을까.
처음으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무리는 사라졌으나
그들의 지혜로운 교훈은 온 세상에 두루 퍼졌다.
밧모 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해와 같이 빛나는 천사를 보았으며
바벨론의 최후에 대한 선포를 듣지 않았던가.
영원하신 만유의 왕 앞에 무릎 꿇은 채
최후 승리를 고대하며 기도하는
성자와 아버지와 남편,
훗날 그들은 한 자리에서 만날 것이다.
그곳에는 자연광선이 비취며
더 이상 한숨이나 눈물이 없고
다함께 창조주를 찬양할 뿐이니
거기선 오직 주를 경외하는 가운데
영원한 시간이 지속된다.
온갖 화려한 기교와 방법을 동원한
어리석은 종교와 비교해 보라.
회중이 사방에서 몰려왔으나
그들은 진정으로 신(神)을 경외하지 않는다.
그 힘과 향기와 화려한 행렬은 사라지고
그 호화로움과 사제(司祭)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게도 외딴 오두막에서는
만족스러운 영혼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 제임스 W. 알렉산더 著 임종원 譯 『가정예배는 복의 근원입니다(Thoughts on Family Worship)』(미션월드 라이브러리 발행)에서 발췌 정리 -
예스러운 가정: 윌버 채프만(John Wilbur Chapman) / 정창영 옮김
more..
◎ “그들이 왕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왕하 20:15)
만약 여러분이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여러분의 가정이 조화를 이루는 화평한 가정인지 아니면 갈등과 절망 상태에 있는 가정인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방명록에 적혀 있는 방문객들의 이름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서재에 꽂힌 책의 제목들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특별히 좋아하는 잡지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하인들과 잠시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여러분이 각별히 좋아하는 친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비록 제가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의 집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서야 이 나라의 수도인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대통령의 각료 중의 한 사람이 저를 초대해서 처음 워싱턴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날 저녁에 달이 밝게 비칠 때,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가다가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건물이 다 있다니, 저게 무슨 건물입니까?” 그는 안됐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국회의사당입니다. 이 나라의 집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점에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건물은 웅장했고,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의 집이 될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국회의사당 건물이 이 나라의 집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어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은 구식(舊式)의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성경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며,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고, 자녀들을 은혜의 왕좌 앞에 바치고 나서는 온 가족이 함께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기도를 드리며 그날의 승리를 향해 나갔고, 저녁 기도를 드리며 하늘의 천사들이 지켜주는 평온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오하이오에 있는 또 다른 가정을 기억합니다. 그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 밖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농장은 10 에이커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두 아들과 두 딸을 길러냈으며, 그 자녀들은 세계 곳곳에서 선교를 했고, 그들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곳과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곳에 알려졌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가정들이 이 나라의 집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분명한 어조로 “프랑스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머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제게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히 나폴레옹과 같이 힘 있게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호화로운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가정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너는 집을 정리하라(Set thine house in order). 이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임이라”(왕하 20:1). 후에 히스기야가 회복되자 바벨론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문병했습니다. 바벨론 왕의 사자가 다녀간 뒤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묻는 말이 바로 본문 말씀인 “그들이 왕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을 중심으로 가장 성스러운 교제와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은 항상 화려할 수 없습니다. 가구들도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가정에는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지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내려와 하늘의 축복을 전하고 이 세상의 고통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러한 가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여러분의 아버지가 일했고,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나치는 사랑은 없습니다.
제 친구 조지 스투아르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실 경우, 그분은 먼저 한 가정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18:19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 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 말씀 속에는 모든 가정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두 가지 중대한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명령할 터인즉”이라는 말씀이 보여 주는 권위
둘째,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라 는 구절이 보여주는 본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정당하게 명령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먼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고는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른 본(本)을 보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즉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을 닮습니다. 그들의 패역함은 바로 여러분의 패역함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건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미덕의 결과입니다.
몇 해 전에 신시내티에서 어머니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어린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훈련시키는 적절한 나이가 언제인지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저는 여섯 살 때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일곱 살이 적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때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처음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노부인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틀렸어요. 어린 아이의 훈련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노부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모든 일이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 인생 가운데 어떤 축복이 있으며, 제 사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저를 축복해 주시며 돌아가신 제 어머니 덕분입니다. 또 팔로 저를 감싸 안고 “얘야, 만약 네가 나쁜 길로 간다면 그것이 이 아빠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덕분입니다. 저는 한 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돈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릇된 길로 첫 발을 내딛었고, 어느 날 밤,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어떤 장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모퉁이를 막 돌아설 때, 갑자기 제 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고, 그분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습니다. 만약 제 아버지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분명히 이 강단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정의 진정한 목적은 이 세상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의 성품을 형성시키는데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난하며 자기희생이 요구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는 가정은 어느 곳이나 기쁨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저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야 말로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을에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을 책벌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소년은 헛간에서나 집안에서나 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에드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없는 게 안됐어!” 에드의 아버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만 그의 농장 수익으로는 가족들을 더 이상 잘 돌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에드가 쉬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 간 후 가족들은 에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에드의 누나가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에드를 학교에 보내 주셨으면 해요.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옷도 옛날에 입던 옷들을 고쳐 입겠어요.” 어머니도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도 이제는 일꾼을 두지 않고 일하겠어요. 물론 제가 일꾼을 두지 않고 일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럼 나도 밤에 다른 집에 가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낮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하도록 하겠다.” 그 후 그들의 식탁에선 설탕이 사라졌고 접시에서는 버터가 사라졌습니다. 그 가족들은 에드가 대학 다니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습니다. 긴 가운과 사각모를 쓴 교수들이 등단했습니다. 잠시 흥분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고별사를 낭독할 졸업생 대표가 소개되었을 때 장내는 흥분의 절정에 달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던 에드가 바로 그 영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에드에게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졸업식장 뒤편에는 낡은 모자에 색 바랜 옷을 입고 있는 에드의 누나와 촌스러운 모습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의 어머니는 육 년 동안 새 모자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새 외투를 입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일어나서 단 위에 서 있는 에드를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에드가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영광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날의 영광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들을 보상해주시는 날, 그들에게 큰 영광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싸움에 내려갔던 자의 몫이나 물건 옆에 머물렀던 자의 몫이 같을지니 그들이 똑같이 나눌 것이니라.”라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상 30:24).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사랑이 없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든지 위대한 힘이 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힘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임의대로 자기 가족이라 하든지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에게 분명하게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도 마땅히 그래야 되지만, 아버지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 자녀들은 매우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신실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신실하지 못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어머니가 신실하지 못한 것은 일생 내내, 아니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인생의 짐을 잘 치워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어머니는 하나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한 가련한 젊은이가 대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오, 만약 저에게 어머니가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항상 격려해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어머니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방황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는 한, 죄에 깊이 빠질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한 불쌍한 신문팔이 소년에 관한 감동어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사랑어린 마음으로 어머니의 무덤에 어머니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비석을 세우기로 작정은 했지만 소년의 적은 수입으로는 비석으로 쓸 돌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사랑은 강했습니다. 채석장에 가 보았지만 싸구려 돌조차 소년에게는 너무나 비쌌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마침내 남아있던 돌들 가운데서 부서진 대리석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채석장 주인은 그 소년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을 만큼 싼 값으로 그 돌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날 소년은 수레에다 그 돌을 실고 어머니의 묘 앞 적당한 자리에 세웠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채석장 주인은 그 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서 그 묘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다음은 그가 보고 들은 것입니다.
“이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라고 묘지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새 무덤들의 맨 앞에 찾던 무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무덤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 돌은 채석장에서 가져갔을 때의 모양 그대로 있었습니다. 저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 어린 소년이 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저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거기에 새겨진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린 소년은 줄을 똑바로 맞추어서 글씨를 새기려고 애를 썼더군요. 모든 문자를 대문자로 썼기 때문에 글씨 전체가 훨씬 더 좋아 보이고 커보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지난주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셨다.
그녀는 영원토록 기다리시겠다고...
여기서 글이 중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후 묘지 관리인에게로 다시 가서 그 돌을 사 간 소년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당신은 그 돌이 세워져 있는 무덤 바로 옆에 작은 새 무덤이 있는 것을 못 보셨나요? 그 무덤에 그 소년이 묻혔어요. 소년은 매일 오후에 여기에 와서 그 돌에 글씨를 새기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이 보이지 않더니 그 후로 며칠 동안 계속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던 차에 소년의 어머니를 장사지냈던 교회 사람이 이번에는 그 소년을 장사지내기 위해서 왔지 뭡니까. 저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그 교회 사람이 대답하기를, 어느 날 그 소년이 신문을 다 팔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마구간을 뛰쳐나와 거리를 질주하던 말들에게 짓밟혀 하루인가 이틀 만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소년은 비석에다 글씨를 새길 때 쓰던 끝이 뾰족한 낡은 정을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죽을 때가지 그 비석 일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년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을 아직 마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제가 그 일을 끝내려고 마음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실 거예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겠어요.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것이 그 소년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채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소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돈을 모아 그 소년의 이름을 알아가지고 가서는 그 돌에다 그 소년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밑에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사랑했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자기 아들에게 이러한 영향력을 끼친 어머니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이제 아버지에 대해서도 몇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아버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너희가 나로 하여금 내 자식들을 잃게 하였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42:36). 다윗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라 고 부르짖었을 때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돌아온 탕자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는 아버지는 또 다른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찬사를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헌신과 성실함에 특별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아버지라는 위치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요건들이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들과 말을 타고 함께 마을길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 녀석이 제가 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저를 보고는 “이거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제 아들 녀석이 저처럼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이 제가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제가 걷는 모습처럼 걷는다면,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과 같이 제 아들도 그렇게 행하게 해 주옵소서.
아버지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이방인이 된다면 그 누구라도 자기 인생의 짐을 질 수 없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 중의 하나는 제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성경책입니다. 그 책의 매 쪽마다 저의 아버지의 숨결이 닿아 있으며, 매 쪽마다 담겨진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지 않고는 단 한 쪽도 읽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책의 한 장 한 장을 거듭해서 읽었네.
줄과 줄 사이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고
약속의 말씀들 밑에는 더욱 진한 줄이 그어져 있네.
금박은 벗겨지고
종이는 노랗게 바래버린 책이지만
이 아버지의 성경책보다 더 귀한 책은 없으리.
책장들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네.
이 책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겼고
이 책에서 넘치는 위로를 받았으며,
궁핍할 때 도움을 얻었고
매일 매일의 일들에서 사랑의 면류관을
이 책에서 얻었네.
이 아버지의 성경책보다
더 귀한 책은 없으리.
또한 아버지는 가정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사업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사업에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가정 제단을 쌓는 것을 방해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삶 가운데 올바로 되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한 사람에 속하는 친구 조지 스투아르트 목사가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내쉬빌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막 끝냈을 때 감리교 목사님 한 분이 저에게로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더군요. ‘스투아르트 목사님, 당신의 설교는 저로 하여금 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한 지역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분이셨죠. 그러나 그분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가족들은 대가족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계신답니다. 저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해서 당신을 모시고 전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헌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만약 당신이 함께 가시겠다면 다음 주 금요일에 모든 가족들을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가겠다고 승낙했지요. 그 예스러운 집은 내쉬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형제와 자매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농부였고, 의사, 목사, 회계사 등, 여러 직업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목사 형제가 저를 그 집에 초청했던 것입니다. 제가 집 대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여기저기에 둘러서서 즐겁게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옛날 집의 마당에 서 보신 일이 있나요? 그리고 길과 마당과 나무, 또 대문과 건물에 얽힌 옛날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이윽고 그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 제 소개가 있었습니다. 목사 형제의 말에 의하면 모든 자녀가 지금까지 지역교회를 섬기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데, 막내 동생만 방황의 길을 걸어 왔으며, 그들이 그렇게 함께 모인 진정한 목적은 바로 그 막내 동생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계셨어요. 주름진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계속 싱글벙글했지요. 저와 그 가족들은 이전에 모이던 예스러운 방에 옛날처럼 둘러앉았습니다. 물론 그 어머니도 옛날처럼 당신의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목사 형제가 커다란 가족용 성경을 제 무릎 위에 놓고는 말했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이제 여기 한 감리교 목사의 가정에서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주십시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한 감리교 목사님의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옛날에 여러분들이 했던 것처럼 예배를 드립시다. 우선 형제 자매님들께서 나이 순서대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랬더니 가장 나이 많은 형제가 일어나서 벽에 걸린 자기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의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저 그림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족들에게 주셨던 아버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아버지의 초상화입니다. 그 분은 여러 번 당신의 개인 기도 장소로 저를 데리고 가서는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답니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이래로 시시때때로 제 머리에 얹으셨던 그분의 손길을 느껴왔고, 그분의 얼굴에 흘러내리던 눈물을 보아왔으며, 떨리는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이래로 마땅히 되어야 할 선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당신과 제 동생들과 연로하신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좀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머지 형제 자매들도 모두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모두는 아버지가 개인 기도 장소에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 형제가 매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버디야, 말해보렴. 여기에 가족들밖에 없지 않니. 우리가 너를 도울 수 있을 거야.’
“그는 일어나서 머리를 부여잡고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우리 가족은 당신이 우리 가족들을 하나님께 헌신토록 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저의 어머니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한 발 짝도 떨어져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형님과 누님들은 이 모임이 저희 자녀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모임이라고 말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잘 압니다. 이 양떼들 중에서 저만 유일하게 검은 염소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과 귀중한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떠나 방황해 온 모든 걸음걸음마다에서 제 머리 위에 놓여졌던 아버지의 손길을 느꼈고, 저를 축복해 주시던 기도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인생으로 돌아옵니다. 다시는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큰 소리로 흐느끼면서 울었습니다. 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예스러운 감리교인 가정의 모임은 찬송 소리에 온통 휩싸였습니다. 그 집에서 떠나오면서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선한 인생의 소금과 같은 것이로구나.’라고 말입니다. 좋은 아버지를 가진 아이는 결코 넘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왕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 까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의 가정은 더 나아져야 되고, 우리들의 삶은 보다 더 진실해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망은 훨씬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 본문이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제리 팔웰 지음「가장 훌륭한 25편의 명설교」(생명의 말씀사)에서 발췌 정리 -
만약 여러분이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여러분의 가정생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여러분의 가정이 조화를 이루는 화평한 가정인지 아니면 갈등과 절망 상태에 있는 가정인지를 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 방명록에 적혀 있는 방문객들의 이름을 제게 보여주십시오. 여러분이 특별한 기쁨을 느끼는 서재에 꽂힌 책의 제목들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특별히 좋아하는 잡지들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러분의 하인들과 잠시 이야기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여러분이 각별히 좋아하는 친구를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면 비록 제가 여러분을 개인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지금은 어떠한 사람이며,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분의 집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한 가정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른이 되어서야 이 나라의 수도인 워싱턴을 방문했습니다. 대통령의 각료 중의 한 사람이 저를 초대해서 처음 워싱턴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첫 날 저녁에 달이 밝게 비칠 때, 그와 함께 말을 타고 가다가 국회의사당 앞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저런 건물이 다 있다니, 저게 무슨 건물입니까?” 그는 안됐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국회의사당입니다. 이 나라의 집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점에서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건물은 웅장했고,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의 집이 될만한 가치가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국회의사당 건물이 이 나라의 집이라는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결코 화려하지 않은 어떤 집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집은 구식(舊式)의 아버지가 아침저녁으로 성경을 읽고, 가족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며, 자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고, 자녀들을 은혜의 왕좌 앞에 바치고 나서는 온 가족이 함께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기도를 드리며 그날의 승리를 향해 나갔고, 저녁 기도를 드리며 하늘의 천사들이 지켜주는 평온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저는 오하이오에 있는 또 다른 가정을 기억합니다. 그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마을 밖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농장은 10 에이커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두 아들과 두 딸을 길러냈으며, 그 자녀들은 세계 곳곳에서 선교를 했고, 그들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진 곳과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곳에 알려졌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러한 가정들이 이 나라의 집입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분명한 어조로 “프랑스에 가장 필요한 것은 어머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제게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분명히 나폴레옹과 같이 힘 있게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호화로운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가정들,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너는 집을 정리하라(Set thine house in order). 이는 네가 죽고 살지 못할 것임이라”(왕하 20:1). 후에 히스기야가 회복되자 바벨론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문병했습니다. 바벨론 왕의 사자가 다녀간 뒤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묻는 말이 바로 본문 말씀인 “그들이 왕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성스러운 곳은 가정입니다. 가정을 중심으로 가장 성스러운 교제와 하나됨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은 가정에 대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은 항상 화려할 수 없습니다. 가구들도 언제까지나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가정에는 하늘로부터 사다리가 내려지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내려와 하늘의 축복을 전하고 이 세상의 고통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러한 가정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여러분의 아버지가 일했고, 여러분의 어머니가 여러분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나치는 사랑은 없습니다.
제 친구 조지 스투아르트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고자 하실 경우, 그분은 먼저 한 가정을 세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가정의 가장(家長)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창세기 18:19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 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 말씀 속에는 모든 가정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두 가지 중대한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명령할 터인즉”이라는 말씀이 보여 주는 권위
둘째,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라 는 구절이 보여주는 본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정당하게 명령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먼저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에게 복종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고는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른 본(本)을 보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즉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은 여러분을 닮습니다. 그들의 패역함은 바로 여러분의 패역함의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건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미덕의 결과입니다.
몇 해 전에 신시내티에서 어머니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어린이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훈련시키는 적절한 나이가 언제인지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저는 여섯 살 때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일곱 살이 적당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그때 예수님을 가르쳐 주고, 처음으로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노부인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틀렸어요. 어린 아이의 훈련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노부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모든 일이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 인생 가운데 어떤 축복이 있으며, 제 사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저를 축복해 주시며 돌아가신 제 어머니 덕분입니다. 또 팔로 저를 감싸 안고 “얘야, 만약 네가 나쁜 길로 간다면 그것이 이 아빠를 죽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덕분입니다. 저는 한 때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돈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미 그릇된 길로 첫 발을 내딛었고, 어느 날 밤, 나쁜 짓을 하기 위해서 어떤 장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모퉁이를 막 돌아설 때, 갑자기 제 앞에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고, 그분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습니다. 만약 제 아버지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저는 분명히 이 강단과는 거리가 먼 타락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정의 진정한 목적은 이 세상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의 성품을 형성시키는데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가난하며 자기희생이 요구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는 가정은 어느 곳이나 기쁨이 넘쳐흐르게 됩니다. 저는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이야기야 말로 진정한 인생의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을에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을 책벌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소년은 헛간에서나 집안에서나 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에드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할 수 없는 게 안됐어!” 에드의 아버지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일했지만 그의 농장 수익으로는 가족들을 더 이상 잘 돌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에드가 쉬기 위해 자기 방으로 들어 간 후 가족들은 에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에드의 누나가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아빠가 에드를 학교에 보내 주셨으면 해요.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옷도 옛날에 입던 옷들을 고쳐 입겠어요.” 어머니도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도 이제는 일꾼을 두지 않고 일하겠어요. 물론 제가 일꾼을 두지 않고 일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좋아, 그럼 나도 밤에 다른 집에 가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낮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일하도록 하겠다.” 그 후 그들의 식탁에선 설탕이 사라졌고 접시에서는 버터가 사라졌습니다. 그 가족들은 에드가 대학 다니는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세월은 흘러가고 드디어 졸업식 날이 되었습니다. 긴 가운과 사각모를 쓴 교수들이 등단했습니다. 잠시 흥분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고별사를 낭독할 졸업생 대표가 소개되었을 때 장내는 흥분의 절정에 달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던 에드가 바로 그 영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박수갈채와 함께 환호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날은 에드에게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졸업식장 뒤편에는 낡은 모자에 색 바랜 옷을 입고 있는 에드의 누나와 촌스러운 모습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의 어머니는 육 년 동안 새 모자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새 외투를 입어보지 못했습니다. 가족들은 일어나서 단 위에 서 있는 에드를 바라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에드가 꽃다발을 받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영광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쳤던 것입니다. 그들이 그날의 영광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들을 보상해주시는 날, 그들에게 큰 영광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싸움에 내려갔던 자의 몫이나 물건 옆에 머물렀던 자의 몫이 같을지니 그들이 똑같이 나눌 것이니라.”라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삼상 30:24). 이 이야기는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사랑이 없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가정에든지 위대한 힘이 둘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두 힘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을 임의대로 자기 가족이라 하든지 자기 가족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모는 자녀들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중요합니다. 모든 어머니들에게 분명하게 필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도 마땅히 그래야 되지만, 아버지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면, 그 자녀들은 매우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신실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신실하지 못한 것을 잊어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어머니가 신실하지 못한 것은 일생 내내, 아니 영원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기도보다 더 인생의 짐을 잘 치워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어머니는 하나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한 가련한 젊은이가 대법정에서 판사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에게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오, 만약 저에게 어머니가 계셨더라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항상 격려해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지라도 어머니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기 어머니를 잊어버리지 않는 한,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방황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는 한, 죄에 깊이 빠질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한 불쌍한 신문팔이 소년에 관한 감동어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 대한 사랑어린 마음으로 어머니의 무덤에 어머니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비석을 세우기로 작정은 했지만 소년의 적은 수입으로는 비석으로 쓸 돌을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사랑은 강했습니다. 채석장에 가 보았지만 싸구려 돌조차 소년에게는 너무나 비쌌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마침내 남아있던 돌들 가운데서 부서진 대리석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채석장 주인은 그 소년의 호주머니 사정에 맞을 만큼 싼 값으로 그 돌을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날 소년은 수레에다 그 돌을 실고 어머니의 묘 앞 적당한 자리에 세웠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 채석장 주인은 그 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서 그 묘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다음은 그가 보고 들은 것입니다.
“이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라고 묘지 관리인이 말했습니다. 새 무덤들의 맨 앞에 찾던 무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무덤을 즉시 알아보았습니다. 그 돌은 채석장에서 가져갔을 때의 모양 그대로 있었습니다. 저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갔고, 그 어린 소년이 해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자마자 저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거기에 새겨진 글씨를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린 소년은 줄을 똑바로 맞추어서 글씨를 새기려고 애를 썼더군요. 모든 문자를 대문자로 썼기 때문에 글씨 전체가 훨씬 더 좋아 보이고 커보였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지난주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셨다.
그녀는 영원토록 기다리시겠다고...
여기서 글이 중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잠시 후 묘지 관리인에게로 다시 가서 그 돌을 사 간 소년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당신은 그 돌이 세워져 있는 무덤 바로 옆에 작은 새 무덤이 있는 것을 못 보셨나요? 그 무덤에 그 소년이 묻혔어요. 소년은 매일 오후에 여기에 와서 그 돌에 글씨를 새기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이 보이지 않더니 그 후로 며칠 동안 계속 보이지 않더군요. 그러던 차에 소년의 어머니를 장사지냈던 교회 사람이 이번에는 그 소년을 장사지내기 위해서 왔지 뭡니까. 저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어보았어요. 그랬더니 그 교회 사람이 대답하기를, 어느 날 그 소년이 신문을 다 팔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마구간을 뛰쳐나와 거리를 질주하던 말들에게 짓밟혀 하루인가 이틀 만에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 소년은 비석에다 글씨를 새길 때 쓰던 끝이 뾰족한 낡은 정을 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소년이 죽을 때가지 그 비석 일만 생각했던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년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일을 아직 마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제가 그 일을 끝내려고 마음먹고 있다는 사실을 아실 거예요.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씀드리겠어요.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것이 그 소년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다음날 채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소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돈을 모아 그 소년의 이름을 알아가지고 가서는 그 돌에다 그 소년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 밑에다 “그는 자기 어머니를 사랑했다.”라는 감동적인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자기 아들에게 이러한 영향력을 끼친 어머니를 긍휼히 여겨주소서!
이제 아버지에 대해서도 몇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아버지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너희가 나로 하여금 내 자식들을 잃게 하였도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창 42:36). 다윗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라 고 부르짖었을 때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돌아온 탕자 아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주는 아버지는 또 다른 아름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찬사를 보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헌신과 성실함에 특별한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아버지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아버지라는 위치를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요건들이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들과 말을 타고 함께 마을길을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 녀석이 제가 하는 것과 똑같이 자기 친구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저를 보고는 “이거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제 아들 녀석이 저처럼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이 제가 말하는 것처럼 말하고 제가 걷는 모습처럼 걷는다면,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행하는 것과 같이 제 아들도 그렇게 행하게 해 주옵소서.
아버지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이방인이 된다면 그 누구라도 자기 인생의 짐을 질 수 없고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에게 가장 귀중한 보물 중의 하나는 제 아버지께서 읽으셨던 성경책입니다. 그 책의 매 쪽마다 저의 아버지의 숨결이 닿아 있으며, 매 쪽마다 담겨진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지 않고는 단 한 쪽도 읽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책의 한 장 한 장을 거듭해서 읽었네.
줄과 줄 사이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고
약속의 말씀들 밑에는 더욱 진한 줄이 그어져 있네.
금박은 벗겨지고
종이는 노랗게 바래버린 책이지만
이 아버지의 성경책보다 더 귀한 책은 없으리.
책장들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네.
이 책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겼고
이 책에서 넘치는 위로를 받았으며,
궁핍할 때 도움을 얻었고
매일 매일의 일들에서 사랑의 면류관을
이 책에서 얻었네.
이 아버지의 성경책보다
더 귀한 책은 없으리.
또한 아버지는 가정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사업을 하시는 많은 분들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여러분의 사업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사업에는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이 가정 제단을 쌓는 것을 방해한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삶 가운데 올바로 되어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한 사람에 속하는 친구 조지 스투아르트 목사가 어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내쉬빌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막 끝냈을 때 감리교 목사님 한 분이 저에게로 와서 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더군요. ‘스투아르트 목사님, 당신의 설교는 저로 하여금 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제 아버지는 한 지역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제가 아는 한 가장 훌륭한 분이셨죠. 그러나 그분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제 가족들은 대가족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직도 생존해 계신답니다. 저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족들을 다시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해서 당신을 모시고 전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헌신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만약 당신이 함께 가시겠다면 다음 주 금요일에 모든 가족들을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가겠다고 승낙했지요. 그 예스러운 집은 내쉬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형제와 자매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농부였고, 의사, 목사, 회계사 등, 여러 직업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목사 형제가 저를 그 집에 초청했던 것입니다. 제가 집 대문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여기저기에 둘러서서 즐겁게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옛날 집의 마당에 서 보신 일이 있나요? 그리고 길과 마당과 나무, 또 대문과 건물에 얽힌 옛날의 즐거웠던 기억들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이윽고 그 고상하게 보이는 사람들에게 제 소개가 있었습니다. 목사 형제의 말에 의하면 모든 자녀가 지금까지 지역교회를 섬기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데, 막내 동생만 방황의 길을 걸어 왔으며, 그들이 그렇게 함께 모인 진정한 목적은 바로 그 막내 동생을 다시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늙으신 어머니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계셨어요. 주름진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계속 싱글벙글했지요. 저와 그 가족들은 이전에 모이던 예스러운 방에 옛날처럼 둘러앉았습니다. 물론 그 어머니도 옛날처럼 당신의 구석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목사 형제가 커다란 가족용 성경을 제 무릎 위에 놓고는 말했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이제 여기 한 감리교 목사의 가정에서 당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주십시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한 감리교 목사님의 가족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이제 옛날에 여러분들이 했던 것처럼 예배를 드립시다. 우선 형제 자매님들께서 나이 순서대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랬더니 가장 나이 많은 형제가 일어나서 벽에 걸린 자기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그의 이야기의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저 그림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가족들에게 주셨던 아버지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아버지의 초상화입니다. 그 분은 여러 번 당신의 개인 기도 장소로 저를 데리고 가서는 제 머리에 손을 얹고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답니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이래로 시시때때로 제 머리에 얹으셨던 그분의 손길을 느껴왔고, 그분의 얼굴에 흘러내리던 눈물을 보아왔으며, 떨리는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분이 돌아가신 이래로 마땅히 되어야 할 선한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당신과 제 동생들과 연로하신 어머니께 말씀드리는 것은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좀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흥분된 마음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나머지 형제 자매들도 모두 비슷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모두는 아버지가 개인 기도 장소에서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막내가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면서 이야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 형제가 매우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버디야, 말해보렴. 여기에 가족들밖에 없지 않니. 우리가 너를 도울 수 있을 거야.’
“그는 일어나서 머리를 부여잡고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스투아르트 형제님, 우리 가족은 당신이 우리 가족들을 하나님께 헌신토록 하게 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로하신 저의 어머니는 결코 하나님에게서 한 발 짝도 떨어져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형님과 누님들은 이 모임이 저희 자녀들의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한 모임이라고 말하지만 그분들은 모두 선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을 잘 압니다. 이 양떼들 중에서 저만 유일하게 검은 염소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과 귀중한 아버지의 삶으로부터 떠나 방황해 온 모든 걸음걸음마다에서 제 머리 위에 놓여졌던 아버지의 손길을 느꼈고, 저를 축복해 주시던 기도 소리를 들어왔습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아버지의 인생으로 돌아옵니다. 다시는 방황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큰 소리로 흐느끼면서 울었습니다. 저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예스러운 감리교인 가정의 모임은 찬송 소리에 온통 휩싸였습니다. 그 집에서 떠나오면서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선한 인생의 소금과 같은 것이로구나.’라고 말입니다. 좋은 아버지를 가진 아이는 결코 넘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왕의 집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와 영원한 세상에서 까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의 가정은 더 나아져야 되고, 우리들의 삶은 보다 더 진실해져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열망은 훨씬 더 뜨거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 본문이 우리들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제리 팔웰 지음「가장 훌륭한 25편의 명설교」(생명의 말씀사)에서 발췌 정리 -
기독교TV 인터넷 방송국 CTS.TV, 말씀/교육>오늘의가정예배
가정예배로 건강한 가정 만들자 교회가 모범적인 가정예배 모델 제시해야
우리 집의 신나는 가정예배, 김요한/ 김미란 선교사(GMP)
한경직목사님 가정예배
기독교대한감리회 혜성교회, 가정예배서
하늘양식(2006가정예배서) 기독교대한감리회유지재단(재)
가정 예배 설교 힌트 성구
한국로고스목회정보는 한국교회 목회자 목회정보 설교정보 나눔터입니다
2006/04/24 15:28
2006/04/24 15:28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올해의 목표가 집에서 가정예배드리는 건데.. 연초에 하다가 1달정도 쉬었네요. 다시 시작해야지..^^
시사랑님, 매일같이 가정예배 드리나요? 어떻게 하시는지 tip을 나눠주심이.... 아직 엄두도 못내고 있답니다.
홈페이지가 바뀌었구나. 최근 사진이랑 글 읽고간다. 정말 미국가서 많이 변했구나 하는것을 느낀다. 잘 살고있지? 얼마전 동주(경영86)가 미국에서 나와 잠깐 만나고, 황성수간사님이 미국에서 나와 85,84 선배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도 변함없이 사랑스럽고 가깝게 느껴지는것 그건 우리가 천국 시민이기 때문이겠지. 이곳은 이제 여름이 다가온다. 캠퍼스엔 푸르름이 찾아오고. 바쁜 중에도 이런 작은 자연의 변화가 나에게 사색과 여유를 주는 것에 감사하며